사라지는 기억과 왜곡되는 진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면 모두 잊히고 만다. 마치 백지장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건 그다음이다. 차라리 백지장이 되면 다행이지만, 사람들은 북한의 소행이라거나 우리끼리 총질을 해서 죽었다고, 혹은 우리가 먼저 군인을 쐈다고 백지장에 써넣을 것이 뻔하다. 우리가 사라지면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머리에 박힌 총탄으로 인해 4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통을 겪어온 오상범 씨에게 친구가 건넨 말이다. 친구는 총탄 제거 수술을 망설이는 오 씨를 설득하기 위해 이 말을 꺼냈다. 오 씨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헬기에서 발사한 총에 맞았던 인물이다. 당시 현장에 함께 있던 형은 목숨을 잃었으며, 살아남은 오 씨는 형의 환영을 보거나 스스로를 만든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죄책감 속에 살고 있다. 이는 지난 24일 방영된 SBS 드라마 ‘닥터 엑스(X): 하얀 마피아의 시대’ 6회차에 등장한 대목이다.

시청률 19.5%의 화제성 뒤에 숨은 논란

해당 회차는 전국 시청률 19.5%를 달성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으나, 동시에 거센 논란의 중심에 섰다. 방송이 나간 당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는 드라마의 방영 중단을 요구하는 글이 게시되었다. 청원인은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는 5·18 민주화운동을 드라마 소재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튿날에는 드라마 팬들이 결성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제작진의 해명을 요구하는 성명이 발표되었으며, 관련 기사에는 정치적 편향성이나 특정 진영을 비하하는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사실 5·18을 소재로 삼은 영상물은 과거에도 많았다.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를 시작으로 영화 ‘박하사탕’, ‘택시운전사’, ‘26년’, ‘화려한 휴가’ 그리고 드라마 ‘오월의 청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이 등장했다. 당시에도 반대 목소리가 있었으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5·18은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1995년 특별법 제정과 1997년 국가 기념일 지정은 이를 뒷받침하며, 드라마 속 헬기 사격 장면 역시 2018년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의 발표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문화 영역까지 침투한 이념 갈라치기

최근 들어 반발이 유독 거세진 이유는 정치와 이념을 매개로 한 진영 간의 적대감과 혐오가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문화 콘텐츠조차 진영 논리에 따라 공격받는 양상이 뚜렷해졌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암살자(들)’ 사례가 대표적이다. 극우 세력과 보수 언론, 정치권까지 가세한 가운데 주연 배우 유해진의 광고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배우의 자택 앞 시위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행태는 이번 ‘닥터 엑스’에도 반복되어, 주연 배우 김지원의 SNS에 악성 댓글이 달리고 제품 불매를 주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헌식 중원대 사회문화대 특임교수는 이를 두고 “역사적 퇴행”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이념적 침투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라는 문화계의 핵심 가치를 위협하고 있다. 지난 8월 ‘인천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서 영국 밴드 매시브 어택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을 연주하며 5·18 관련 영상을 송출하자 “좌파 밴드”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또한, 5·18을 다룬 소설 ‘소년이 온다’의 저자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자 보수단체들이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항의하고, 온라인상에서는 수상 취소 청원까지 돌았다. 이는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하는 행위다.

진실을 지키기 위한 두려움 없는 태도

이러한 공격의 목적은 명확하다. 5·18의 배후에 북한이 있다거나 시민들이 먼저 군인을 공격했다는 식의 거짓 정보를 퍼뜨려 대중을 혼란에 빠뜨리고, 진실을 알리려는 창작자들을 위축시키려는 것이다. ‘닥터 엑스’ 속 친구의 경고는 어쩌면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옥규 ‘닥터 엑스’ 책임 프로듀서(CP)는 방영 당일 자신의 SNS를 통해 ‘두렵지 않다(no fear)’는 메시지를 남겼다. 회피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이들이 결국 역사를 바꾸어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