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데이터센터가 불러온 저장 매체의 세대교체

인공지능(AI)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한 데이터센터 투자 열풍이 과거의 저장 기술인 자기테이프와 하드디스크(HDD)의 재도약을 이끌고 있다. AI 학습 및 서비스 과정에서 생성되는 정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이른바 '콜드 데이터(Cold Data)'를 저렴한 비용으로 장기간 보관해야 하는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현재 데이터센터의 저장 매체 시장은 명확한 역할 분담 체계를 갖추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SSD(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는 빠른 데이터 접근을 담당하며, 미국 기업들이 주력하는 HDD는 대용량 저장을 맡는다. 반면 일본이 강점을 가진 자기테이프는 저렴한 비용으로 장기 보관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이는 마치 온라인 스트리밍(SSD), LP나 CD(HDD), 그리고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자기테이프)의 차이와 유사하다.

후지필름, 20년 만에 자기테이프 대규모 증산 결정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후지필름은 가나가와현 오다와라 소재 공장에 2028회계연도까지 총 100억엔(약 900억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한다. 이를 통해 자기테이프의 공급 역량을 대폭 강화할 방침이다. 특히 최대 100TB(테라바이트)까지 수용 가능한 고용량 라인업을 중심으로, 현재의 출하 저장 용량을 5배 수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후지필름이 이처럼 자기테이프 생산 확대를 위해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것은 약 20년 만의 일이다.

자기테이프는 자성 물질이 입혀진 플라스틱 필름을 활용하는 저장 장치로, 경제성과 에너지 효율 면에서 탁월하다. 저장 비용이 SSD의 3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며 전력 소모량도 매우 적다. 비록 데이터를 읽어오는 속도는 느리지만, 방대한 AI 학습 데이터를 장기간 보관하기에는 최적의 대안이다. 또한 네트워크와 물리적으로 분리할 수 있다는 특성 덕분에 랜섬웨어 공격 등에 대응하는 백업 수단으로서의 가치도 높다.

실제로 자기테이프 시장의 성장세는 뚜렷하다. LTO(자기테이프 협의체) 자료를 보면, 전 세계 자기테이프 출하 저장용량은 2020년 105EB(엑사바이트)에서 2024년 176EB로 68% 급증했다. 올해 1분기 역시 전년 동기 대비 57%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최신 LTO 기술은 카트리지당 비압축 데이터 40TB를 담을 수 있으며, 압축 기술을 적용할 경우 최대 100TB까지 저장이 가능하다.

씨게이트 매출 61% 급증…HDD 시장의 동반 호황

하드디스크(HDD) 시장 역시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따른 수혜를 입고 있다. 자기디스크를 회전시켜 기록하는 방식인 HDD는 SSD보다 속도는 뒤처지지만, 용량 대비 저장 비용이 저렴하다는 강력한 장점이 있다. 클라우드 및 AI 기업들이 대규모 데이터 보관을 위해 HDD 도입을 늘리면서 관련 기업들의 실적도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미국 기업 씨게이트는 지난 27일(현지 시각) 발표한 2027회계연도 1분기 실적에서 전년 동기보다 61% 증가한 42억 3300만 달러(약 6조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씨게이트는 이번 분기에 역대 최고 수준의 수익성을 확보했으며, 15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잉여현금흐름(FCF)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또한 2026회계연도의 데이터센터용 기업 HDD 출하 저장용량은 695EB로 예상되며, 이는 전년도 497EB 대비 약 40% 증가한 수치다.

현재 HDD 시장의 주요 생산 주체는 씨게이트와 미국의 웨스턴디지털, 그리고 일본의 도시바다. 도시바 역시 필리핀 공장에 약 600억엔을 투자해 생산 능력을 기존보다 2배로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AI 산업이 커질수록 적은 비용과 전력으로 데이터를 저장하는 기술이 중요해짐에 따라, 첨단 반도체를 넘어 기존 저장장치 시장의 투자와 생산 확대까지 연쇄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