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 만에 드러난 미 대사관의 비밀 기록
누렇게 변색되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한 종이 뭉치 속에는 77년 전의 참혹한 역사가 담겨 있었다. 찢기거나 반쯤 잘려 나간 기록물 사이로, 손으로 휘갈겨 쓴 영어 문장들이 어렵게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을 들여다본 끝에야 공판 날짜와 '검사(Prosecutor)', 그리고 오제도라는 이름이 겨우 읽혔다. 누군가 기존 글 위에 줄을 긋고 다시 덧붙인 흔적도 선명했다.
지난 9월, 김정기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오피스텔에서 만난 이 자료는 그 자체로 역사적 보물이었다. 1949년과 1950년 사이, 주한미국대사관의 한국인 직원들이 삼등서기관 그레고리 헨더슨의 지시 아래 17차례에 걸쳐 국회프락치 사건의 공판 내용을 손으로 기록한 원본이었다. 판사와 검사, 피고인인 제헌국회의원들과 변호인들이 나눈 대화가 고스란히 담긴 이 문서는 미 국무부에 보고하기 위해 타이핑된 보고서 형태로도 존재했다. 한 번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던 이 기록은 헨더슨이 1988년 사망한 후, 그의 부인 마이어 여사가 1992년 김 교수에게 기증하며 빛을 보게 되었다.
헨더슨의 집요한 기록과 한국 민주주의
헨더슨이 이토록 사건에 몰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 교수는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자국의 손실로 간주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미국이 지원한 신생 민주주의 국가였기에, 정치 공작을 묵인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그를 움직였다. 헨더슨은 단순한 관찰자를 넘어 한국사에 깊이 심취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약용을 존경하고 한국 도자기를 수집할 만큼 한국을 사랑했으며, 그가 수집한 유물들은 현재 하버드대 새클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관심은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았다. 1964년 이후 한국 전문 정치학자로 변신한 헨더슨은 1972년 미국 사회과학연구협의회(SSRC)의 지원을 받아 직접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당시 재판장이었던 사광욱과 검사 오제도, 선우종원, 그리고 김준연 의원과 서용길 의원 등 사건 관계자 20명을 인터뷰하며 국회프락치 사건을 학술적 연구 대상으로 격상시켰다. 만약 김정기 교수가 헨더슨의 유족으로부터 이 자료들을 전해 받지 못했다면, 이 모든 역사적 진실은 상자 속에 잠든 채 영원히 잊혔을지도 모른다.
기록자 김우식, 공작의 희생자가 되다
기록의 이면에는 또 다른 비극이 숨어 있었다. 공판 내용을 녹음해 필기체로 옮긴 인물은 당시 대사관 직원이었던 김우식으로 보인다. 그는 기록자였음은 물론,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이기도 했다. 1950년 5월, 그는 경찰에 연행되어 '프락치 자백'을 강요받는 전기고문을 당했다. 그는 남로당이 아닌 북로당의 프락치로 몰렸는데, 이는 북로당 고위 공작원 성시백의 하수인인 송태경과의 교류가 화근이 된 것이었다. 김우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K-1'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프락치로 낙인찍혔다.
다행히 그는 에른스트 프랭켈의 법률 자문과 헨더슨을 비롯한 대사관 측의 강력한 항의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김우식의 사례를 '작은 프락치 사건'이라 부르며, 이를 통해 국회프락치 사건의 실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라고 정의했다. 고문에 의한 자백과 조작된 공작 문서가 어떻게 무고한 정치인들을 법망으로 몰아넣었는지 보여주는 결정적 단서이기 때문이다.
엇갈린 공작과 남겨진 유족들
사건의 실체는 더욱 복잡했다. 강욱중 의원을 비롯해 김옥주, 황윤호 의원 등 제헌국회의원들은 서로 다른 계통의 프락치 혐의를 받았다. 남로당과 북로당이 서로를 향해 공작을 주장하며 경쟁했던 셈이다. 이러한 비극의 역사는 헨더슨과 김우식, 성시백을 거쳐 결국 강욱중 의원의 딸인 강금자 여사에게로 이어진다. 77년 전의 기록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라, 국가 권력에 의해 삶이 파괴된 이들의 고통을 증언하는 살아있는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