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통신 기록 요구에 샌드위치 된 통신업계

여야 정치권이 특정 인물의 휴대전화 기기변경 내역을 포함한 통신 기록을 잇달아 요청하면서 이동통신 3사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국회의 정당한 자료 제출 요구를 외면할 경우 형사처벌을 받을 위험이 있는 반면, 요구에 응할 경우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통신업계는 법적 의무를 이행하는 민간 사업자가 정치적 공방의 화살까지 맞고 있다며, 국회가 자료 요구의 범위와 절차, 그리고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먼저 수립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대법원장까지 거론된 기기변경 내역 요구와 여야 공방

30일 정치권과 업계에 따르면,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22일 더불어민주당 소속 위원의 요청에 따라 조희대 대법원장의 기기변경 관련 자료를 열람했다. 해당 자료는 유플러스가 제출한 것이며, SK텔레콤은 요구된 기간인 2024년 12월 1일 이후의 기기변경 내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회신했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은 사법부 수장의 기록을 확인하려는 시도를 '사찰'로 규정하며 비판했으나, 자료를 요구한 의원 측은 국회법 및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한 적법한 절차였다고 맞섰다. 이 과정에서 통신사가 법적 의무가 없음에도 자의적으로 판단해 정보를 넘긴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며 논란은 자료를 제출한 통신사로까지 번졌다.

반복되는 통신 기록 공개와 제도적 허점

국회의 통신 자료 요구는 여야를 막론하고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2024년 12·3 비상계엄 사태 직후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번호이동 및 신규개통 내역이 통신사 제출 자료를 통해 공개된 바 있으며, 지난해 4월에는 최상목 당시 경제부총리와 류희림 당시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의 기록이, 9월에는 지귀연 부장판사의 기기변경 이력이 차례로 드러났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가입 통신사가 특정되지 않은 요구는 3사 모두에 전달되며, 해당 인물이 가입자가 아닐 경우 '해당 없음'으로 답변한다. 통신사들은 모두 동일한 법적 근거에 기반해 자료를 제출해왔다는 입장이다.

법적 의무와 사생활 보호 사이의 충돌

현행 국회증언감정법 제2조는 국정감사나 국정조사 관련 서류 제출 요구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개인정보 보호법 제18조 제2항 역시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정보 제공의 예외 사유로 인정한다. 이에 따라 민간 사업자가 국회의 의결을 거친 요구를 자체적으로 판단해 거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다만 국정감사법 제8조는 사생활 침해나 수사 중인 사건의 소추 관여를 금지하고 있으나, 업계는 이 조항이 통신사에 자료 요구의 적법성을 독자적으로 심사할 권한을 준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특히 통신 정책을 관장하는 과방위의 요구라는 점이 이통사들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통지 절차 부재와 국회의 기준 마련 촉구

한 이통사 관계자는 법대로 제출하면 개인정보 침해 비판을 받고, 거부하면 처벌과 국회의 반발을 감당해야 하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라며, 현재 외부 법률 검토를 거쳐 일관되게 대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수사기관의 요청과 국회의 요구는 법적 성격도 다르다. 2022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수사기관의 정보 요청에는 통지 의무가 도입됐으나, 국회에 자료가 제출된 경우 정보주체에게 이를 알리는 절차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통신업계는 국정감사 목적과의 연관성, 요구 항목의 최소화, 위원회 의결 여부 및 정보주체 통지 등에 관한 명확한 기준을 국회가 정해주길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