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없는 정년 연장, 기업에만 떠넘기는 비용

양복을 맞출 때 신체 치수를 재지 않고 옷부터 제작할 수 있을까. 오래도록 입을 수 있는 의복을 만들려면 향후 발생할 변화까지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 정년 연장 논의도 이와 다르지 않다. 노동시장의 구조적 변화나 향후 직무의 변동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년 시점만 늦추는 것은, 마치 옷의 크기에 몸을 억지로 맞추라고 강요하는 정책과 다를 바 없다.

지난 13일 고용노동부 장관은 정년 연장을 위한 법안을 연내에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고령층에게 노동의 기회를 제공하고, 퇴직 시점과 연금 수령 시기 사이의 소득 공백을 메워야 한다는 취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책이 실질적인 합리성을 얻으려면 지속 가능한 고용 모델을 찾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왜 하필 연말이라는 시한을 정해 입법을 서둘러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남는다.

과거 60세 정년 의무화가 추진될 당시에도 임금피크제 도입 등 임금 체계 개편이 병행되어 논의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 합의조차 실제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보장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정부가 특정 날짜를 못 박으며 입법을 독촉하고 있다. 단순히 법안을 통과시킨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지난 개편 과정에서 어떤 지점이 막혔으며, 이번에는 이를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AI 시대, 변화하는 노동시장과 생산성의 문제

현재 노동시장의 체질은 이미 변화하고 있다. 플랫폼 노동과 특수고용직, 프리랜서 및 프로젝트 기반의 계약 형태가 공존하는 시대다. 특히 인공지능(AI)의 등장은 업무의 구성 방식과 요구되는 역량의 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특정 직무는 축소되는 반면, 새로운 역할이 창출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정규직 중심, 전일제 근무, 연공서열형 임금 체계를 유지한 채 근속 기간만 늘리는 방식으로는 미래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

고령 노동자가 보유한 숙련도와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다. 이를 실질적인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직무와 권한을 재설계하고, 기술 전수 체계와 재교육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단순히 근속 기간을 연장하는 것과 시간당 가치를 높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생산성 개선이 동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금 부담만 가중된다면, 그로 인한 격차를 누가 책임질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법률에 따라 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주체는 결국 기업이다. 입법의 성과는 정부가 가져가면서 그 비용은 기업에 전가한다면 이를 책임 있는 정책이라 부르기 어렵다. 이러한 비용 부담이 신규 채용 축소나 투자 지연, 혹은 협력업체로의 비용 전가로 이어질 가능성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만약 세금으로 이를 보전하려 한다면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비용과 편익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고용 안정만을 약속해서는 안 된다.

지속 가능한 고용을 위한 정책의 순서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면 일자리 자체를 유지하기 어렵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우리 기업들에게 국내 제도의 변화는 투자 결정과 사업 입지를 결정짓는 핵심 조건이 된다. 기업의 성장과 '대체불가 대한민국'을 강조하면서도, 노동 정책이 초래할 과도한 비용과 불확실성을 외면하는 것은 모순이다. 기업과 노동자가 함께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임금과 세수, 나아가 기술력과 국방력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정년 연장을 추진하기에 앞서 직무와 숙련도, 책임에 따른 합리적인 보상 원칙과 노사 협의 절차가 선행되어야 한다. 단순히 나이를 근거로 임금을 삭감하는 방식은 공정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업무 내용이나 근로 시간이 변할 때 보상을 어떻게 책정할지, 전환기 소득 충격을 완화할 방안은 무엇인지 검토가 필요하다. 기업 규모나 업종에 맞춰 정년 연장, 재고용, 근로시간 단축, 전문직무 전환 중 최적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유연성도 확보되어야 한다.

단순히 합의안에 서명하는 것만으로 모든 절차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이행 계획과 점검 기준, 분쟁 해결 절차를 마련해야 하며, 이것이 청년 채용이나 고령자 소득, 기업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을 검증해야 한다. 또한 정년 이전에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나 비정형 노동자들의 기회도 함께 살펴야 한다. 정부는 단순히 법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실행 과정을 지원하며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삼전닉스 성과급' 사태가 남긴 후유증이 이제 막 시작된 시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히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의 우선순위를 전환하는 것이다. AI 시대에 접어든 만큼 과거의 고용 틀을 그대로 연장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미래 노동시장의 변화를 예측하고 그에 부합하는 제도의 치수를 정해야 한다. 정년이라는 옷의 크기부터 늘려놓고, 기업과 노동자에게 그 옷에 몸을 맞추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