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조선업 생태계의 실상과 역사적 배경
흔히 조선업 하면 울산이나 거제를 떠올리지만, 목포와 영암, 해남을 잇는 서남권에도 거대한 산업 생태계가 존재한다. 영암의 HD현대삼호에는 약 2만 3천 명의 인력이 근무 중이며, 대불국가산업단지에는 선박 블록과 각종 기자재를 생산하는 업체들이 밀집해 있다. 해남에는 대한조선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은행 목포본부의 2022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남 서남부 9개 시군 내 10인 이상 사업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조선업은 제조업 고용의 70.7%를 점유할 만큼 압도적이다. 이곳의 조선업은 지역 청년, 특히 남성들에게 가장 핵심적인 일자리 공급원 역할을 하고 있다.
서남권의 조선 산업은 1973년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 경부축 중심의 발전 정책에서 소외되었던 호남 지역 산업 정책의 산물이다. 호남에 대규모 산업 시설을 유치하려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1987년 민주화와 대선 국면을 거치며 지역 개발 요구가 거세졌고, 노태우 대통령의 서해안 개발 공약에는 군산·군장산업기지와 대불기지, 항만 및 도로 건설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시혜적 개발 정치를 통해 1988년 대불산단이 지정되었고, 1991년 새만금 방조제 건설, 1992년 삼호조선소 착공으로 이어졌다. 간척과 농지 개발로 시작된 새만금 역시 산업 용지를 공급하는 거점으로 변모했다. 이후 군산에는 GM 자동차와 HD현대중공업 조선소, 두산인프라코어 건설기계 공장이 들어섰고 해남에는 대한조선이 입성했다.
기업 유치의 한계와 불안정한 고용 구조
부지 마련이 곧 기업의 입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대불산단은 1997년 준공 이후 2004년까지 분양률이 50%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침체기를 겪었다. 이후 조선업 호황기에 접어들면서 블록 제작 업체들이 들어서며 빈자리를 메웠으나, 이는 산업단지를 조성해 공장을 유치하면 지역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기반한 것이었다. 기술 연구개발(R&D)이나 설계 역량을 갖춘 우량 기업을 육성하거나 유치하는 전략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결국 군산의 자동차 및 조선업 구조조정 사례에서 확인되었듯, 대기업 본사의 결정에 따라 지역의 일자리와 삶의 기반이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정성이 드러났다. 대규모 공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지역의 안정적인 미래를 담보해주지는 못했다.
청년들이 마주한 저임금과 인력 유출의 현실
목포와 영암의 청년들은 기술 습득을 희망하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조선소에 입사한 한 청년은 수입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철판과 부재의 위치를 맞추는 취부 작업을 선택했다. 그러나 한 달간 잔업과 특근을 모두 수행해도 월급은 280만~300만 원 수준에 머물렀다. 기술 숙련을 통한 소득 증대를 기대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전했다. 결혼과 주거 문제를 언급하자 청년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며 설계 단계로의 경력 확장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조선소를 벗어나도 대안은 없었다. 2022년 하반기 목포의 18~39세 임금근로자 중 절반 이상(50.1%)이 월 200만~300만 원 미만의 급여를 받았으며, 2025년 기준 목포와 영암의 20대 인구 순유출은 전남 전체 20대 유출량의 39%를 차지할 만큼 심각하다. 주거와 생활비 문제로 정착하지 못한 청년들은 더 나쁜 전망을 마주하며 떠나고 있다.
이중 구조화된 노동 시장과 이주 노동자 문제
조선소 내부의 노동 시장은 철저히 분절되어 있다. HD현대삼호의 경우 직영 정규직은 약 3,600명인 반면, 사내 협력사는 1만 6,000명, 물량팀은 3,000명에 달한다. 호봉제와 주거 지원이 보장되는 원청 생산직의 문턱은 매우 높다. 반면 하청 노동자들은 열악한 처우에 놓여 있으며, 대불산단 내 업체들의 환경은 현대삼호나 대한조선보다도 더 나쁜 실정임을 청년들은 인지하고 있다. 과거 동남권의 '중공업 가족'이 누렸던 중산층의 꿈은 이곳에서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또한 현장에는 이주 노동자들도 상당수 포진해 있다. 이들은 잔업과 특근을 포함해 월 250만~280만 원 정도를 받는다고 전했다. 외국인 사용 제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대불산단 가공업체나 일부 하청 현장에는 고려인을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가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저임금 구조는 지역 청년들의 임금 가치를 함께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며, 숙련공 확보를 어렵게 만든다.
영세성 탈피를 위한 산업 정책의 과제
서남권 조선업의 영세성은 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전남 조선업체의 81.1%가 50인 미만 사업체이며, 임가공업 비중이 전국 평균보다 2.3배 높다. 연구개발 역량을 갖춘 기업은 부족하고 물량 처리 위주의 업체만 많다. 대형 조선소가 호황을 누려도 주변 협력사의 기술력이나 설비 개선은 미비해, 원청과 산단 사이의 격차만 벌어지고 있다. 현대삼호가 용접 로봇을 도입하고 설계 플랫폼 공동개발에 나섰지만, 대불산단의 소규모 업체들이 이를 따라갈 여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자동화 시대에도 결국 품질을 책임질 숙련공의 노하우가 필요하지만, 15살 이상 차이 나는 선임 밑에서 기술을 전수받아야 하는 불안정한 양성 구조는 한계가 명확하다. 또한 여성 일자리의 부족도 심각하다. 현대삼호의 여성 임직원 비율은 3.9%에 불과하며,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제조업 비중이 높은 나주 지역의 식품 공장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결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제언
서남권은 저임금과 영세성, 낮은 부가가치가 얽힌 덫에 갇혀 있다. 이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지역의 생존 전략이다. 신산업 유치도 중요하지만, 기존 조선·기자재 산업이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 업체에 대한 장기적 투자와 대학·연구소의 인적·물적 자원 연결, 현장 훈련 강화가 필수적이다. 반짝이는 신산업 정책만큼이나 기존 산업의 노후 설비와 경력 단절 문제를 해결하는 '깨진 유리창' 수리 노력이 필요하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청년들에게 제조업은 안정된 삶을 위한 중요한 통로가 되어야 한다. 기술을 배우는 청년들이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기성세대가 짊어져야 할 산업 정책의 핵심적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