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빅파마, AI 기술로 신약 개발 초기 단계 공략
영국의 아스트라제네카는 지난 15일, 미국 AI 바이오 전문 기업인 인시트로와 최대 15억 달러(약 2조 원)에 달하는 신약 공동 탐색 계약을 체결했다. 인시트로는 질병의 메커니즘을 가상 환경에서 재현하는 인공지능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활용해 심근병증 및 지방간염(MASH)의 발생 원인을 규명하고 새로운 치료 표적을 발굴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이후 진행될 임상 개발과 제품 판매 단계는 아스트라제네카가 전담하게 된다.
최근 글로벌 대형 제약사(빅파마)들은 신약 개발의 첫 단추를 AI 기업에 맡기는 추세다. 타겟 질환을 선정하는 단계부터 임상 시험의 설계 과정까지 AI의 조력을 받아 개발 실패율을 낮추겠다는 전략적 판단이다. 실제로 이번 달에만 아스트라제네카를 포함해 미국의 일라이 릴리, 덴마크의 질랜드 파마가 각각 AI 신약 개발사와 계약을 맺었다. 이 세 건의 계약 규모를 모두 합산하면 최대 38억 달러(약 5조 원)에 이른다.
비만 치료제부터 LNP 설계까지 확장되는 협력 범위
질랜드 파마는 지난 13일, AI를 통해 새로운 단백질 약물을 설계하는 미국 제너레이트 바이오메디신의 기술을 도입하며 최대 12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양사는 여러 표적을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비만 및 대사 질환 치료제를 공동으로 개발할 방침이다. 또한 미국 일라이 릴리는 지난 19일 홍콩의 메티스 테크바이오와 최대 11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메티스는 유전물질인 RNA 치료제를 목표 조직까지 운반하는 나노 크기의 지질나노입자(LNP)를 AI로 설계하는 기술을 가졌다. 릴리는 앞서 지난 3월에도 인실리코 메디슨과 최대 27억 5,0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맺은 바 있다.
빅파마들이 AI 기업과 손을 잡는 핵심 이유는 적은 자본으로 실패에 따른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약 총액은 조 단위에 달하지만, 실제 초기 지급액은 극히 일부다. 예컨대 아스트라제네카가 인시트로에 지급하는 초기 계약금은 4,000만 달러로, 전체 계약 규모의 3%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머지 금액은 AI가 찾아낸 표적 기반의 약물이 임상 단계를 통과하고 실제 판매로 이어지는 성과에 따라 단계별로 지급된다. 이를 통해 약물 개발이 중단될 경우 제약사가 입는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AI 플랫폼을 자체 구축하는 데 드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급증하는 제약-AI 제휴 규모와 임상 성적표
제약 산업과 AI 기술의 결합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제약 거래 분석 기관인 딜포마에 따르면, 양측의 신약 개발 제휴 건수는 2024년 84건에서 지난해 114건으로 증가했으며, 올해 상반기에만 이미 70건이 체결됐다. 계약 규모 역시 2024년 118억 달러에서 지난해 434억 달러로 3.7배 급증했다. 올해 상반기 계약 총액은 459억 달러를 기록하며 이미 작년 전체 규모를 넘어섰고, 이 중 실제 지급된 현금은 19억 달러(약 2조 7,000억 원) 수준이다.
AI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실질적인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IQVIA 연구소의 지난 5월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3년간 AI를 활용해 개발된 신흥 바이오 기업의 신약 후보물질 임상 1상 성공률은 75%를 기록해 일반 후보물질보다 높은 수치를 보였다. 프랑스 제약사 세르비에는 인실리코 메디슨과 공동 연구 중인 항암제 분야에서 표적 선정 및 초기 후보물질 발굴을 통해 첫 마일스톤을 달성했다고 지난 20일 발표했다. 투자 열기도 뜨거워 구글 딥마인드에서 분사한 아이소모픽 랩스는 올해 2분기에만 21억 달러(약 2조 9,000억 원)의 투자를 확보했다. 한국 기업인 SK바이오팜도 지난 6월 인실리코 메디슨과 최대 25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해, AI 플랫폼으로 뇌신경 면역 질환 치료 표적 3개를 선정하고 전임상 단계까지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다.
다만 AI 기반 신약이 실제 의료 현장에 도입되기까지는 여전히 과제가 남아 있다. IQVIA의 분석 결과, AI 활용 후보물질의 임상 2상 성공률은 일반적인 후보물질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임상 3상까지 진입한 사례는 통계적 분석이 어려울 정도로 매우 희소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