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공급망 주도권과 애플의 강경 전략

인공지능(AI) 산업의 급격한 팽창으로 플래시 메모리 수요가 폭증하면서, 그동안 공급업체들을 압도해온 애플의 가격 협상력이 역풍을 맞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보도에 따르면, 애플은 키옥시아를 비롯한 메모리 제조사들을 상대로 매우 강력한 협상 태도를 유지해 왔다. 아이폰의 막대한 판매량 덕분에 전 세계 플래시 메모리 물량의 20% 이상을 점유하며 세계 최대의 수요처로 군림해왔기 때문이다.

반도체 제조 공정은 막대한 고정비가 발생하므로 공장 가동률을 높게 유지해야 이익을 낼 수 있는 구조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공급업체들은 애플의 대규모 발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애플은 이를 이용해 업계 최저가 수준의 계약을 요구해 왔으며, 심지어 회계장부 감사 조항을 삽입해 공급업체가 다른 고객에게 자신들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메모리를 판매하는 것을 원천 봉쇄했다. 실제로 10여 년 전 마이크론이 타사에 더 낮은 가격으로 플래시 메모리를 공급한 사실이 적발되자, 애플은 중재 절차를 거쳐 수천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낸 사례도 있다.

재고 전가와 공격적인 협상 기술

애플은 장기 구매 계약을 맺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다. 시장 가격이 하락할 때 인수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주문을 조절함으로써, 공급업체들이 애플 전용 칩이나 재고를 떠안도록 유도했다. 또한 경쟁사들의 미팅 일정을 조율해 영업 담당자들이 서로 마주치게 만들거나, 생산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회계 정보를 활용하는 등 치밀한 협상 전술을 구사했다. 키옥시아의 영업 임원 스콧 넬슨은 애플과의 불합리한 관계에 항의하기 위해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사용했으며, 아이팟을 소총으로 격파한 조각을 책상에 보관했다고 언급하며 과거의 갈등을 증언했다.

AI 열풍이 불러온 가격 폭등과 구매력 역전

하지만 AI 열풍이 불면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테크인사이트의 자료를 보면 지난 1년간 플래시 메모리 가격은 무려 5배나 치솟았다. 2023년 기가바이트(GB)당 5센트였던 가격은 현재 550% 상승한 30센트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더욱이 과거에는 애플의 메모리 구매량이 하이퍼스케일러(초대형 데이터센터 운영사)의 2배에 달했으나, 이제는 오히려 하이퍼스케일러의 구매량이 애플을 2배 앞지르고 있다.

데이터센터 운영사들은 높은 메모리 비용을 감당할 경제적 여력이 충분하다. 데이터센터 건설 비용 중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이폰 제조 원가보다 낮으며, 관련 비용을 여러 해에 걸쳐 회계상 분산 반영할 수 있어 재무적 부담도 적기 때문이다. 반면 애플은 메모리 가격 상승의 직격탄을 맞았다. 올해 플래시 메모리 구매를 위해 약 250억 달러를 쓸 것으로 예상되지만, 확보할 수 있는 물량은 지난해 60억 달러를 투입했을 때와 비슷한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

수익성 악화와 소비자 가격 인상 대응

애플의 수익 구조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동안 애플은 저렴하게 확보한 메모리를 바탕으로 소비자에게 추가 용량을 판매해 높은 마진을 남겨왔다. 지난해 아이폰17 프로 512GB 모델을 위해 소비자가 지불한 추가 비용은 200달러였으나, 애플의 실제 비용은 15달러 수준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이 비용이 66달러까지 상승했다. 이에 대응해 애플은 최근 거의 모든 제품의 가격을 올리고 있다. 아이폰 가격은 평균 13% 인상되었으며, 여기에는 가격 하락이 일반적인 구형 모델도 포함되었다.

WSJ은 가격 인상에 따른 소비자들의 반응이 관건이라고 분석했다. 소비자들이 높아진 가격 때문에 아이폰 교체 주기를 늦출지, 아니면 기존의 구매 추세를 유지할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애플이 메모리 제조사들을 상대로 과거와 같은 강력한 협상력을 언제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도 업계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