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가 견인한 지표 성장과 체감 불황의 괴리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우며 수출 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올해 4분기 성장률이 1.4% 이상을 달성할 경우 연간 성장률 4% 달성도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러한 지표상의 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차가운 현실이 존재한다. 반도체 호황이 만든 수치적 성장과 달리, 골목상권과 저소득·저신용 차주들이 느끼는 실물경기는 여전히 혹독한 불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출 대기업 중심의 성장과 내수 부진이 공존하는 'K자형 단절' 현상은 한국 경제의 심각한 위협 요소로 부상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일 국회에서 진행된 내년도 예산안 관련 시정연설을 통해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지적했다. 이 대통령은 특정 계층이나 소수 기업에만 성과가 쏠리는 '소수의 성장'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과 지역이 성장의 결실을 고르게 나누는 '모두의 성장'으로의 대전환을 강조했다. 또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하는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성장과 분배라는 낡은 이분법적 논쟁을 넘어선 새로운 성장 공식을 적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재정 정책의 역할과 민생 지원의 전략적 가치

현재 한국은행은 한미 금리 격차와 환율의 변동성, 부동산 시장 집중화에 따른 가계부채 위험 등 난제를 안고 있어 긴축 기조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다. 고금리 환경은 자산가나 대기업보다 영세 자영업자와 서민, 한계기업에 훨씬 가혹한 고통을 안겨준다. 따라서 통화정책과 발맞추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정부의 재정 정책이다. 통화정책이 거시 경제의 건전성을 수호한다면, 재정은 반도체 산업에서 창출된 세수와 성장의 온기가 내수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수출 대기업에 집중된 성장의 과실을 사회 전반으로 순환시키는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지역화폐와 온누리상품권을 활용해 골목상권의 매출 기반을 강화하고 내수 경기를 회복시켜야 한다. 특히 소상공인과 서민을 위한 고금리 대출 완화, 청년층 주거 안전망 강화 등 3대 민생 지원은 단순한 복지 차원을 넘어선다. 이는 내수 침체를 방어하고, 취약계층의 채무 불이행이 금융권 전체의 부실로 이어지는 시스템 리스크를 막기 위한 선제적인 '방어적 투자'로서 가치를 지닌다.

정밀한 재정 집행을 통한 거시 안정과 성장

다만 재정의 역할이 무분별한 유동성 공급으로 변질되어 한국은행의 물가·환율·가계부채 안정화 노력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수도권 부동산 가격 안정은 정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다. 재정 확대로 인해 물가와 금융 불안이 재점화되면 고금리 상황이 장기화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또한 과도한 국채 발행은 시중 금리를 자극해 민간 투자를 위축시키고, 국가채무비율 상승으로 인한 국가신인도 하락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결과적으로 재정 정책은 규모를 무작정 키우기보다 필요한 곳에 정밀하게 투입되는 '치밀한 집행'이 핵심이다. 한계 상황에 놓인 소상공인과 차주의 원리금 부담을 경감하는 동시에, AI와 첨단 인프라 등 잠재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핵심 분야를 선별하여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모두의 성장'이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거시 안정을 위한 통화 긴축과 온기를 전달하는 재정 집행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국회가 이를 뒷받침하는 물길을 열어줘야 한다. 정치권의 발목잡기로 성장의 그늘이 방치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30년 만에 공적 자금 상환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경제 생태계 전반으로 온기가 흐른다면 대한민국은 다시 도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