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웨어 철학 뒤집은 애플의 승부수

애플이 그동안 고수해 온 설계 원칙을 깨고 사상 처음으로 터치스크린 기능이 탑재된 맥북 프로를 세상에 내놓았다. 노트북에 터치 기능을 넣지 않겠다는 기존의 완고한 입장을 번복한 이번 결정은, 하드웨어 전문가 출신인 존 터너스 신임 최고경영자(CEO)가 취임 초기부터 애플의 제품 설계 철학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는 분석을 낳고 있다.

지난 28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신제품 공개 행사에서 애플은 '맥북 프로 위드 프로LED XDR 디스플레이'를 공식 발표했다. 이 신제품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술이 적용된 차세대 디스플레이를 통해 색상 표현력과 밝기를 대폭 끌어올렸으며, 시야각 또한 이전보다 확장되었다. 내부에는 애플이 독자 개발한 M5 프로 및 M5 맥스 칩이 탑재되며, 노트북 전용 운영체제인 맥OS를 기반으로 구동된다. 특히 기존 프로급 노트북들과 비교해 더 가벼운 무게를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공개된 시연 영상에서는 사용자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직접 쓸어 넘기며 이미지나 동영상을 정밀하게 조작하는 모습이 담겨 터치 기능의 실용성을 강조했다. 해당 제품은 오는 11월 6일 출시될 예정이며, 14인치 모델의 시작 가격은 2899달러, 16인치 모델은 최소 3399달러부터 책정되었다. 두 모델 모두 이전 세대 제품들보다 가격이 눈에 띄게 인상되었다.

터너스 체제의 가속화되는 제품 출시 주기

이번 발표는 지난 9월 터너스 CEO가 부임한 이후 세 번째로 이루어진 주요 신제품 출시로, 향후 애플의 하드웨어 업데이트 주기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터너스는 애플 합류 이후 맥(Mac) 라인업 개발에 깊이 관여해 온 인물이다. 그는 실리콘 부문 책임자인 조니 스루지와 협력하여 인텔 칩을 대신해 애플 자체 칩을 맥에 이식하는 대대적인 전환 과정을 주도해 왔다. 애플 측도 공식 CEO 교체 발표 당시 터너스의 맥 개발 기여도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수십 년간 노트북의 터치스크린 도입에 부정적이었던 애플의 입장이 변화했다는 점은 상징적 의미가 크다. 터너스 CEO는 이번 발표를 통해 "맥에 사상 처음으로 터치 기능을 도입한다"고 직접 밝혔다. 과거 2018년 소프트웨어 책임자였던 크레이그 페더리기는 터치스크린 노트북이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될 경우 사용자의 피로도를 높일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당시 애플은 아이패드가 터치에, 맥이 간접 입력에 최적화된 기기라는 논리로 기존 설계를 유지해 왔으며, 터너스 역시 2021년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유사한 입장을 견지했었다.

시장의 관측과 전략적 가치

시장조사업체 IDC의 라이언 라이스 부사장은 윈도우 기반 노트북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터치 기능을 제공해 왔으나, 소비자들이 이를 핵심 구매 요인보다는 부가 기능 중 하나로 인식한다고 설명했다. IDC 통계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노트북 출하량 중 터치스크린 탑재 모델은 17%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평균 판매가 또한 터치 기능이 없는 모델보다 다소 낮은 경향을 보인다. 라이스 부사장은 애플이 그간 인터페이스 통합을 미뤄온 이유가 기술적 한계 때문이라기보다, 아이패드를 노트북처럼 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완성도 높은 소프트웨어와 사용자 경험을 준비할 적절한 시점을 기다린 결과라고 분석했다.

또한 이번 신제품은 맥이 애플 전체 사업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비중이 확대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최근 분기 기준 맥의 매출은 103억 5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전체 매출의 약 10%를 차지했다. 비록 아이폰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맥은 수많은 개발자가 아이폰 앱을 제작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공식 지원 플랫폼으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최근 애플은 클라우드가 아닌 기기 자체에서 구동되는 '로컬 AI(엣지 AI)' 환경의 강점을 부각하기 위해 자체 칩과 메모리 아키텍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메타의 AI 모델 개발팀은 올해 AI 에이전트 테스트를 위해 수백 대의 맥 미니를 도입했다. 애플과 메타의 협력 관계 발표에 따르면, 고속 케이블로 연결된 다수의 맥을 활용하면 대규모 모델 구동이 가능해져 개발자들이 오픈AI나 앤트로픽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에이전트형 코드를 실행할 수 있다.

침체된 시장과 비용 상승의 압박

이번 제품 출시는 글로벌 노트북 시장이 11%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 침체기에 이루어졌다. AI 수요 폭증에 따른 메모리 공급 부족이 가격 상승을 유발하며 수요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IDC에 따르면 3분기 PC 출하량은 전년 대비 20% 급감했으며, 애플의 PC 출하량 역시 같은 기간 11%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애플 또한 메모리 가격 상승의 여파를 받고 있으며, 팀 쿡 전 CEO가 언급했듯 현재의 가격 상황은 지속 불가능한 수준에 가깝다. 이로 인해 8월 공개된 맥 미니를 포함해 올해 출시된 대부분의 맥 제품 가격이 인상되었다.

한편, 이번 발표는 터너스 체제 하의 활발한 제품 출시 행보의 정점을 찍었다. 애플은 이번 주 M6 칩을 탑재한 신형 아이맥과 맥북 프로 모델을 공개하며 지난 6월의 가격 인상 기조를 이어갔다. 앞서 26일에는 전작보다 100달러 비싼 699달러부터 시작하는 신형 아이패드 미니를 선보였으며, 지난달에는 첫 폴더블폰인 아이폰 듀오와 AI 시리가 탑재된 스마트 스피커 홈뷰를 출시하며 공격적인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