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증시의 최대 주주는 누구일까. 개인도, 연기금도 아닌 일본은행(BOJ)이다. 중앙은행이 주가지수 연동 상장지수펀드(ETF)를 통해 일본 상장사 시가총액의 약 7.5%를 간접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중앙은행이 위험자산의 ‘큰손’으로 자리 잡은 이 장면은 글로벌 금융사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다.
숫자로 보면 규모는 더욱 압도적이다. 지난해 9월 기준 일본은행의 ETF 보유 장부가는 약 333조원. 이를 시가로 환산하면 765조원에 이른다. 평가차익만 430조원을 웃돌며 수익률은 130% 수준이다. 투자 원금을 2.3배 불린 셈이다. 일본은행은 이 자산을 한 번에 처분하지 않고, 연간 매도 규모를 시가 기준 6조원 이하로 제한해 순차적으로 매각하기로 했다. 이 속도라면 ETF 잔액이 완전히 소진되기까지 100년 이상이 걸린다. 정책 하나를 시작해 빠져나오기까지 한 세기가 소요되는, 통화정책사에서도 이례적인 실험이다.
이 비전통적 정책의 출발점은 시장의 ‘투정’이었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은 디플레이션과 자산 가격 붕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장기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닛케이 지수는 8000선 초반까지 밀렸고, 제로금리와 국채 매입만으로는 자산시장을 되살리기 어렵다는 회의론이 확산됐다. 2003년 민간 연구기관에서는 중앙은행이 ETF와 부동산투자신탁을 직접 매입해 자산 가격을 끌어올리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놨다.
당시 일본은행은 이를 일축했다. 중앙은행이 주식이라는 위험자산을 사들이는 것은 시장 왜곡과 재무 리스크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대규모 양적완화가 현실이 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결국 일본은행은 2010년 대규모 자산매입 정책을 도입하며 ETF 매입이라는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이후 양적·질적 금융완화 정책과 결합되며 매입 규모는 급격히 확대됐다.
14년에 걸친 ETF 매입은 단순한 시장 부양을 넘어 예상치 못한 효과도 낳았다. 일본은행이 간접 주주로 참여한 기업들의 배당 성향이 높아지고, 지배구조 개선 압력이 강화됐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중앙은행의 존재가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 활동을 자극하는 촉매로 작용한 셈이다. 정책 설계 당시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 효과까지 만들어낸 사례다.
이제 일본은행은 ETF 매입을 중단하고,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출구 전략에 들어섰다. 매년 소규모 매각을 통해 수익을 실현하면서도 시장 충격은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이는 단기 처방이 아니라 수십 년을 내다본 정책 운용의 결과물로 평가된다.
이 지점에서 질문은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향한다. 금리 정책과 국채 매입만으로 경기와 자산시장을 조절하기 어려운 국면에서, 한국은행은 과연 어느 정도의 정책 상상력과 유연성을 갖추고 있는가. 일본의 사례를 그대로 답습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규칙과 관행이 빠르게 무력화되는 시대에 중앙은행 역시 전통적 틀을 넘어선 사고 실험을 준비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는 있다.
시장의 투정은 언제든 반복된다. 문제는 그때 중앙은행이 기존 교과서만 붙들 것인지, 아니면 충분히 단련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선택지를 꺼내 들 수 있는지다. 일본은행의 ETF 실험은 그 질문을 한국 경제에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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